일상(日常)하면 떠오르는 단어를 지금 당장 메모지에 적어볼 것. 반복, 지루함, 타성, 보통, 항상, 언제나, 늘. 일상은 항상 반복되고 언제나 지루하다. 타성에 젖기도 쉽고 늘 보통의 상태로 계속된다. 그런 일상에서 새로움을 보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국어 사전을 펼쳐 나오는 예문만 봐도 그렇다. “일상으로 하고 있는 일.” “현대인은 시간에 쫓기며 바쁜 일상을 살고 있다.” “일상에 묻혀 오랫동안 감추어져 있던 회향(回鄕)에의 의지가…. (최일남, 서울 사람들)”그렇다. 일상은 늘 있는 것이고, 우리가 쫓겨 바쁘게 느끼는 것이며, 생각과 의지를 ‘묻는’ 것이다. 서울미술관은 《안봐도사는데 지장없는전시》를 통해 마냥 단조롭게만 느껴졌던 ‘현대인의 일상’을 재조명한다. 이번 전시는 아침, 낮, 저녁, 새벽의 총 네 개 파트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에 따라 시간의 흐름을 좇아 일상을 소재로 다룬 현대미술전 분야 약 100여 점을 만나볼 수 있다. 이번 전시를 통해 일상의 비일상성을 느껴보자. IXDesign이 늘 말해온 것처럼, “모든 삶과 모든 일은 예술이다.”

 

 

 

황선태 ㅣ 07:30
 

아침 세션에서는 이정우, 황선태, 이형준, 요고 나카무라, 노이연 작가의 전시를 만나볼 수 있다. 황선태 작가의 시도는 무척 흥미롭다. 유리와 보드판으로 제작된 스크린 위에 드로잉과 발광다이오드(LED)를 통해 제작한 <빛이 드는 공간> 연작은 햇살이 쏟아지는 익숙한 공간들을 연상케 한다. 황선태 작가의 작품이 특별한 점은, 별도의 채색 없이 빛과 라인만으로 우리를 어떤 순간의 어떤 공간으로 데려다 놓는다는 것이다. 빛이 맺힌 계단 앞에 서면 관객들은 작가를 따라 지하실로 내려가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햇살이 내리쬐는 강당에서는 학창시절 체육관에 모여 떠들던 작은 나를 흐뭇한 모습으로 바라보게 된다. 우리 주변의 빛이라고 해서 다를 건 없다. 동이 트면 내 작은 방에도 어느새 빛이 드리운다. 커튼을 스친 빛은 내 눈을 띄우고 나는 하루를 시작한다. 무심코 지나치지만, 내 곁의 빛도 이렇게나 아름답다.
 

 

 

 

 

유고 나카무라 ㅣ 8:10

 

 

조금 더 나아가면, 관객은 유고 나카무라 작가의 독특한 세계를 마주하게 된다. 한쪽 벽면을 가득 채운 스크린에 반복 재생되는 영상은 그 앞에 선 관객을 압도한다. 작품의 이름은 . 촘촘한 스크립트로 짜인 한 편의 애니메이션은 우리의 출근길을 연상케 한다. 좁디 좁은 플랫폼으로 끝없이 몰려드는 사람들. 좁은 열차에 억지로 몸을 끼워 맞추는 승객들. 사람들 사이에 한계치에 가깝게 실려가다 보면 어느새 발에 땅이 닿지 않아도 움직이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유고 나카무라 작가는 독일에서 물리학을 전공한 미술감독으로, 물리학을 기반으로 한 자신의 철학 세계를 작품 위에 펼친다. 한 방향으로 계속 걷기만 할 뿐이던 작품 속 군중들은 이내 서로에게 총을 겨누기 시작한다. 그들은 총을 맞고, 곧 사라진다. 꽉 막힌 출근길 위에 이어지는 서로를 향한 총격. 유고 나카무라의 작품은 바쁘고 삭막한 현대인의 일상을 작품을 통해 효과적으로 드러낸다.
 

 

 

노연이 ㅣ 11:00

 

삭막한 일상은 관계를 공허하게 만든다. 노연이 작가의 작품에서처럼 말이다. 노연이 작가는 ‘혼자’가 무엇인지에 대해 주목한다. 노연이 작가의 작품 속 인물들은 각기 혼자다. 개별의 작품에서 그들은 홀로 등장하고, 누군가 함께 등장하는 작품이더라도 그들은 서로 눈을 마주치는 법이 없다. 작품에 등장하는 연인조차 실은 분리된 캔버스 너머에서 겨우 함께할 뿐이다. 노연이 작가의 그림에서 주목해야 할 점은 또 분리된 개개인 뿐만은 아니다. 그들을 무엇이 분리하고 있느냐 역시 눈 여겨 볼 필요가 있다. 바로 선이다. 기하학적인 모양으로 공간과 공간, 인물과 인물을 분리하는 이 선들은 작품 밖으로 나와 각기 작품과 작품을 연결하는 역할을 한다. 어쩌면, 작가는 현대사회의 개개인은 분리되어 있지만 동시에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주려 했을지도 모른다. 하나의 직물에서 날실과 씨실은 결국 개별로 분리되어 있는 듯하지만, 실은 모두 직조되어 연결되어 있는 것처럼.

 

 

 

마운틴 스튜디오 ㅣ 14:00

 

걸음을 옮기면 온통 노란색으로 장식된 공간을 만날 수 있다. 이곳은 2019 올해 최고의 모바일 게임(Best Mobile Game)으로 선정된 ‘플로렌스(Florence)’를 감상하고, 또 체험할 수 있는 곳이다. 게임은 이제 하나의 종합 예술이 되었다. 그림, 음악, 영상을 담고 있으며 관객과 끊임없이 상호작용한다. 마운틴 스튜디오(Mountains Studio)가 개발한 이 게임은 연애의 과정을 그리고 있다. 한 사람을 우연히 알게 되고, 그에게서 설렘을 느끼고, 사랑에 빠지고, 연애를 하고, 권태기를 맞고, 서로를 원망하게 되고, 헤어지고, 그 때문에 슬픔을 느끼는 지난하고 아픈, 그렇지만 아름다운 과정을 담아냈다. 게임을 체험해보는 관객들은 누구라도 자신의 지난 연애들을 떠올리며 아파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알고 있다. 공감은 가장 효과적인 약이라는 것을.
 

 

 

요시유키 오쿠야마 ㅣ 17:30


요시유키 오쿠야마 작가는 현재 일본에서 가장 뜨거운 관심을 받고 있는 20대 사진작가다. 2011년 대학 재학 당시부터 커리어를 시작했다. 포카리 스웨트 광고를 찍은 작가로도 유명하지만, 그는 무형의 존재를 여러 기법을 통해 이미지화하는 작가이기도 하다. 그의 사진은 어딘가 빛이 바라기도 했고, 강렬하기도 하다. 때로는 초점이 제대로 잡히지 않은 양 느껴지지만 때로는 선 하나 하나가 또렷하게 다가온다. 그는 사진에 시선을 담기 위해 트리밍을 하고, 이미지의 순서를 바꾸고, 촬영한 사진을 프린팅해 다시 촬영하기도 한다. 이렇게 완성된 그의 사진에는 그만의 따스함이 담겨 있다. 이번 전시에 출품된 작업들은 요시유키 작가의 사진집 에 실린 것으로, 특별하고 독특한 것, 멋지고 세련된 것보다는 우리가 주변에서 흔히 만나볼 수 있는 풍경을 소소하게 담아냈다.
 

 

 

 

이오 ㅣ 19:00

 

이오 작가의 주된 소재는 ‘몸’이다. <연결사회>는 한 남성의 몸을 촬영, 사진을 재배열해 연결한 것이다. 이러한 연결을 통해 이 몸은 마치 뫼비우스의 띠처럼 이어졌다. 스크린에 복잡하게 연결된 전기선들은 보통 감춰지기 마련이지만, <연결사회>에서는 전선 역시 작품을 구성하는 하나의 요소로 외부의 자극을 수용하는 인간의 신경다발을 연상케 한다. 이오 작가는 인간과 기술의 유사점을 찾는다. 기술이 발전하며 인간이 점점 퇴화한다고 보는 시선도 있지만, 기술이 발전하며 인간의 삶 역시 단계적으로 발전해왔다. 이 작품처럼, 기술은 발전했고 우리는 이 작품으로 인해 이전에는 느낄 수 없던 것들을 느낀다.


 

 

김태연 ㅣ 21:35

 

김태연 작가는 ‘소재’를 고민한다. 오랫동안 태피스트리 작업을 해온 작가는 소재와 제약, 표현의 한계에 대해 고민하던 중, 직조와 재봉기법을 활용해 그만이 가진 섬유소재를 찾아왔다. 그것은 신문지였고, 종이였으며, 포장지였고, 풍선이였으며, 테이프이기도 했다. 그러던 중, 작가는 ‘비닐’의 물성에 집중한다. 소재로서의 풍부한 가능성, 동시에 인간이 비닐을 사용함으로써 일으키고 있는 수많은 환경오염. 비닐로 직조된 가방 가운데 자리한 이 ‘비닐 섬(Plastic Island)’은 바다 한 가운데에 쓰레기들이 쌓여 만들어졌다는 쓰레기 섬을 연상시킨다. 동시에 작가는 인간을 떠올린다. 인간들 역시 이렇게 쓰이고 버려지는 일회용품과 다를 바 없구나,하고 말이다.

 

 

 

 

빛나는 ㅣ 02:45
 

 

대개봉, 지구는 너무 좁다, 모든 것이 무너진다, 전 세계를 사로잡은 환상적인 여행, 북미 박스오피스 대반전 흥행 주인공, 결정적 한방, 악마를 잡기 위해 손잡다, 너희 다 죽었어, 박스오피스를 메운 포스터에 적힌 문구들이다. 잘 디자인된 영화의 포스터들은 영화의 내용과 주제를 함축적으로 드러내지만, 관객들을 유혹하기 위해 적힌 문구들은 쉽게 주의를 앗아가 버린다. 영화 포스터를 디자인하는 스튜디오 ‘빛나는’은 이번 전시에서 다른 선택을 했다. 감상이 아니라 선전물이 되어버린 포스터에서 문구도, 제목도 제거했다. 오로지 영화 속 단 한 장면만이 남아 관객들을 매혹한다. 한숨나는, 상영중, 압도적인, 경이로운, 눈이 썩는, 쓰레기, 발로 만든. 영화를 홍보하고 평가하는 강력한 단어들은 전단지에서 따로 뜯겨 전시된다. 이제 진짜 영화를 감상할 시간이다.
 

 

 

 

전시의 이름은 ‘안봐도사는데 지장없는전시’이지만, 전시장의 풍경을 둘러보고 나면 우리의 삶의 부분 부분이 예술임을, 그리고 그런 예술들이 우리의 삶을 다시 어떻게 풍요롭게 만들고 있는지를 깨닫게 된다. 이 전시를 보지 않은 이들에게 이 전시는 정말 ‘안 봐도 사는 데 지장이 없는’ 전시일 것이다. 이 전시뿐만 아니라 모든 전시가 그럴 것이다. 하지만 이 전시를 보고 난 관객들은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이 전시를 통해 내가 보는 하루가 조금은 달라졌음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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